그로부터 근 30년. 얼마 전 신간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라는 제목의 책을 접했다. 경희대와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최한 인문학 강연을 한데 묶은 책이었다. '스타 강사' 강신주를 필두로 이름을 짚어가다가 다섯 번째 이태수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어찌나 반갑던지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여기저기 무성한 인문학 열기에 대해 조금은 의구심을 갖던 차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인문학 강의를 발견한 것 같았다. 지금은 인제대 인간환경미래연구원장이자 학술협의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그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청했다. 이 요란하고 화려한 대중 인문학의 시대, 대체 인문학이 무엇인지 들려달라고. 인터뷰는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꽤 길지만 전문을 소개한다. 마지막 두 질문은 나중에 덧붙인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첫 인터뷰가 끝난 후 뒤늦게 몇몇 질문이 떠올라 이메일을 보냈고, 이 교수는 장문의 답을 보내왔다. 마침 국제 학술 행사에서 기조 발제할 주제와도 관련이 있어 생각한 내용들이라고 했다. 심도가 있는 만큼 다소 학술적이지만,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일종의 심화 학습이 될 것으로 생각해 줄이지 않았다. 인내심 있게 읽다 보면 머리 속에 인문학의 윤곽이 그려질 것이라 기대한다. 이하 인터뷰 전문.
-국내에서는 드물게 일찌기 서양 고전학을 공부하고 와서 가르쳤다. 특별히 그 길을 택한 계기나 이유가 있다면?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선생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가서 가장 감명깊게, 그러니까 '이분이 스승인 것 같다' 하고 생각하고 강의를 듣고 배운 분이 박홍규 교수이셨다. 그분이 그리스 철학을 가르쳐 주셨는데, 철학이란 것이 이런 분야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내용을 가르쳤다. 나뿐만 아니라 그분께 끌린 사람이 꽤 있었다. 같은 시기에 철학을 가르친 분들 중에 가장 열렬한 제자를 많이 끌어모을 수 있는 분이셨던 것 같다. 지금도 기일이 되면 우리끼리 산소도 찾아가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전을 공부하게 된 또다른 나름의 이유는 내 성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인문학이라는 게 항상 근원을 캐려드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하게 돼있다. 주어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안주하면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어쩌다 이런 제도를 만들게 됐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나, 그 이유를 캐는 데 관심이 있어야 인문학을 하게 되는데, 캐고캐고 들어가면 결국 고전 공부까지 가는 것이 정상적인 경로라고 생각한다. 특히 고전이 내게 매력있었던 것은 근원을 캐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더해, 그 근원이라는 게 알고 보니 사실은 낯선 것이고 모르는 것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가 애당초 거기서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지만 캐고 들어가서 보니까, 잊어버린 낯선 세계였다는 신선함이 있다.
고전학이 무엇인가를 두고도 학자들 사이에 철학적 논쟁도 많이 하는데 두 입장이 대립한다. 낯선 것을 찾아가는 것에 가치를 인정하는 쪽과, 그 반대로 인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재확인하는 입장으로 나뉜다. 나는 둘 다 이유가 된다고 본다. 사실 찾아들어가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것인데,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캐보니까 낯설고 새로워 보이는 것이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 좀 낯선 것, 새로운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누가 나보고 젊었을 때 왜 우리 것을 공부 안 했느냐고 묻는다면, 어차피 우리 거니까라고 생각했고, 왜 지금 것을 안 했느냐고 하면, 어차피 현재를 사니까, 내가 잘 모르는 것, 내가 안 살아본 것을 공부하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내 맘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선생님에 대한 매력과 더해져 고전 공부로 끌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고전학은 인문학의 기본에 해당한다. 외국 대학에는 독자적인 학과가 있는 것으로 안다. 국내 현황은 어떤가?
"지금도 없다. 대학원 협동과정 형태로만 서울대에 있다. 고전학을 처음 가르쳐 주신 분이 박홍규 교수님이셨는데, 학교 강의 외에 집에서 라틴어로 서양 고전을 강독했다. 텍스트는 여러 사람이 토론하면서 함께 읽어야 한다면서. 대학 3학년 땐가 어느날 내가 라틴어 공부하는 걸 아시고는 와서 같이 하라고 해서 참석했다. 많아야 두세 명이었는데 그때 김우창 선생, 박전규 선생이 와 계셨다. 하루 걸러 모여 책을 읽었다. 박홍규 선생이 희랍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게 된 것은 일제 때 일본 유학 가서 프랑스 신부들한테 배웠다고 했다. 박 선생 자신이 서양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전어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지금까지 우리가 서양 인문학 공부한 게 반세기는 넘었는데 겉핡기가 된 게 서양 고전 뿌리부터 안 해서 그렇다. 마치 동양 문화를 공부하겠다면서 한문학을 안 하는 거랑 같다. 서양 문화가 그리스로마 문화를 계승한 것이라고 자처하고 실제로 그 정신을 이어받은 문명인데, 그 뿌리에 해당하는 공부는 소홀히 한 채 16~17세기 이후 200~300년 서양 문명만 공부하고서 서양을 깊이 안다고 얘기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전공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서양 고전을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옛날 것 공부하는 걸 너무 싫어하게 됐다. 우리에게 옛것이라고 하면, 전부 타기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다. 불행한 역사 때문이다. 19세기 때 급작스럽게 국가철학이고 개인의 인생철학이고 다 바뀌어버려 이전 것은 없애야 좋은 게 돼버렸다. 서양은 자기 것을 발전시켜 지배적인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정치나 문화에 보수라는 것이 정말 의미있는 집단이다. 한국에서는 대개 재벌 편 들면 보수라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보수라고 하면 문화적 의미에서 과거부터 지켜온 기초에 해당하는 것은 지켜가겠다는 철학이 있는 보수다. 우리 보수는 그런 철학이 없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없다. 한국 보수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진보에도 불행이다. 왜냐면 진보의 매력은 재벌 공격에만 있는 게 아니라 기존 가치 질서 문화에 대해 아주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새 대안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을 소홀히 하는 것과 지금 그런 분위기가 한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다행히 요즘 고전이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이제 우리도 생각하는 시간의 범위가 넓어질 거라고 본다. 지금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피상적인 유행의 기미도 있지만, 보다 깊은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 범위가 이제 19세기 이후 혹은 6.25 이후 반세기 너머로 확장된다는 증거 아닌가 한다."
-과거 고전학은 국내에서 불모지였다. 좀 나아졌나?
"커지지는 않았고 없었던 게 생겨나서 꾸준히 이어지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 정식 전공 단위가 없으니까 대학원 과정에서 키우는데 취직이 어렵다. 여기저기 시간강사도 하고 철학 분야에 취직한다. 사회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늘면 그 다음 단계로 대학에서도 고전학에 대한 관심도 더 늘고 지원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대학에서 말하는 인문학의 위기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여러 측면에서 진단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20세기, 21세기 들어와서 사실 인문학은 전례없이 번성했다고 본다. 통계를 보면 그렇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하는 수가 19세기까지의 수를 훨씬 능가했다. 가령 18-19세기에 인문학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인구는 정말 한줌도 안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엔 인문학이라고 하면 한문 공부하는 걸로 보듯했다. 20세기 들어오면서 각 민족어로 쓰인 인문학 문헌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고전학만 해도 절대 수로도 인원이 늘었고 연구 분야도 넓어져왔다. 독자 수도 많이 늘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썼을 때 독일 전역에서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수와 20세기 전 세계에서 읽게 된 수만 비교해 봐도 그렇다. 그런데도 인문학이 오그라들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회과학 응용과학 분야가 커지면서 예전같지 않아졌다는 얘기다. 대학 내 위상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은 틀림없다. 학내 상대적 위상만 보니까 그런 거다."
-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오래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단어 자체가 우리 말이 아니고 번역어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문학을 안 했다는 것은 아니고 공맹을 읽어온 것은 틀림없는데, 그걸 인문학이라고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과거엔 학문이 곧 인문학이었다. 인문학이 특정 분야를 지칭하게 된 것은 서양에서 학문 분화가 일어난 후에 그것을 수입해 번역하면서 역사, 철학, 문학을 묶어 부른 것이다. 조사를 더 해봐야겠지만 일본 사람이 붙인 이름이 틀림없을 것이다. 르네상스를 인문주의의 부흥이라고 부른 것도 일본 사람이다.
인문주의의 원어가 휴머니즘인데, 휴머니즘이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 어원인 휴머니타스가 라틴어인데 인간됨, 인간성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문헌을 공부하는 것도 휴머니티에 들어갔다. 그리스 문헌을 읽을 줄 알아야 사람 노릇한다는 뜻이었다. 옛날에 한문 공부를 해야 사람 노릇한다고 말했던 것과 통한다. 인문학이라는 말의 뿌리에 벌써 고전 공부가 들어가 있다. 따라서 어원으로 보자면 고전을 공부하는 게 인문학이다. 동양도 마찬가지다. 공자맹자 읽는 것이 인문학 공부다. 우리가 워낙 고전을 친숙하게 여기지 않다 보니, 고전을 빼고 일반화해서 인문학을 규정하려니까 어려움을 겪는데 일단은 그런 뜻이다. 그렇다고 고전 공부를 안 한 사람은 인문학자가 아니라는 건 아니다."
-인문학은 개념적으로 봤을 때 보편학이다. 그래도 동서양에 차이가 있지 않나? 종국엔 융합돼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름의 개성이나 차이가 강조돼야 한다고 보나?
"인문학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특정 문화권과 묶여 있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보편적이라고 인정된 가치들도 특정 공간과 시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게 생길 때부터 있는 게 아니라 처음엔 특수한 문화와 시대를 반영한 것이지만, 역사를 통해 다른 문화권에 설득력을 발휘해서 생긴 것이다. 동양의 공맹노장도 일단 중국에서 시작했지만 동아시아 일대에서 그런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보편적 가치로 인정되고, 그것에 입각해 인문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보편적이면서도 발생 문화권의 특색을 버리지 못한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영어로 인문학을 하면 한국 인문학이 아니다. 우리 말로 해야 한다. 우리 말 속에 근원적인 체험이나 생각 이런 게 다 녹아있다. 그걸 학문적으로 정련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우리 삶을 떠나서 인문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의 인문학'은 따로 있어야 한다. 영어 인문학, 그리스 인문학이 있는 것처럼. 서로 문화 교류를 하다 보면 공감의 폭이 큰 게 있을 수 있다. 그게 지금까지는 그리스에서 만들어낸 정신적 성취였고 그게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퍼진 것이다. 우리로서는 한문 문화권에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하고, 서양 문화가 왜 이렇게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하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 인문학은 동서양 고전을 다 공부해야 한다."
-그리스 고전 시기의 인문학은 특별한가? 무엇이 그런가?
"동양 문화권과 비교해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동양의 경우 공맹을 읽기 시작해 19세기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문학 일변도였다. 반면, 그리스 고전 인문학은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문과 학문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인문학 정신이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수학으로도 이어지고 지식 분야 지평을 더 넓혔다. 그게 그리스 고전 시대 15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서양의 인문학은 좁은 뜻에서 인문학도 있었지만 과학도 있었다. 그 결과 과학화된 사회 탐구도 서양에서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런 생산의 싹이 그리스 인문학에 있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보다시피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한국 인문학'의 필요성을 얘기했는데,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말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다. 자칫 욕을 먹을 수도 있을 텐데. 국내 대학의 역사라는 게 반세기 조금 지난 정도인데, 짧은 기간에 서구 대학의 첨단 모습을 너무 따라가려는 바람에 인문학도 전공 세분화가 너무 빨리 이뤄졌다. 덜 익은 바나나를 배에 싣고 오면서 인위적으로 서둘러 숙성시킨 격이랄까. 자연스럽게 지식 분야가 커지면서 세분화로 간 게 아니라, 서양에서 세분화된 결과를 그냥 수입했다. 그 결과 인문학자들이 뿌리는 모른 채 전공 울타리 속에 갇히고 말았다. 또 대학제도상 교수들이 논문을 써내야 하니까 정말 너무 좁게들 공부한다.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내야 점수를 얻으니까 더 세별화된 주제를 연구한다. 그 결과 한국 사회가 인문학자한테 기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먼 것들만 공부하고 있다. 아주 비인문학적인 결과가 돼버린 거다. 그게 우리 인문학의 큰 문제다. 동양 인문학 교수들은 그쪽대로 서양식으로 세분화된 구조 속에서 공부한다.
내 생각엔 한국 인문학자들이 세분 전공 분야에선 좀 뒤지더라도 인문학의 뿌리가 무엇이며, 왜 사회가 요구하는지에 대해 좀더 생각을 해야 하지 않나 한다. 이렇게 말하면 연구 논문 경쟁하느라 바쁜데 언제 그런 걸 하느냐고 하는데, 그러는 한 한국 인문학은 한국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인문학의 위기는 그게 위기지 학생 안 오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이 나라에서 인문학이 뭘 기여할 건가 의식을 하지 않는 한, 지금처럼 대접 받아도 별로 억울할 게 없다. 인문학은 고급 문화를 이끌고 가는 힘을 발휘할 때 대접받는 것이지, 미국의 어느 전문잡지에 아주 세부 주제로 글 하나 써내는 것으로 자기 할 일 한다고 생각하면 사회가 대접해줄 이유가 없다. 여러 전문가 중 하나는 되겠지만."
-대학 인문학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쇠퇴한 반면 대중 인문학은 열기가 뜨겁다.
"열풍이란 건 식기 마련이다. 열풍이 불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관심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요란하게 나팔소리를 내다가 가라앉기보다는, 서서히 인문학의 저변이 계속 확대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열풍은 경계할 대목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관심이 커진 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대중 인문학 강연의 수준과 대학 인문학 연구 수준의 괴리는 어느 나라보다 크다고 본다. 그 이유는 대학 쪽 잘못도 있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 수요를 그림으로 그리면 피라미드형이 될텐데, 첨단 연구일수록 수가 적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첨단 연구에 입각해 소설도 쓰고 응용도 하는 인력이 많아야 한다. 초등학교나 인문 교양 같은 대중 교육 인원이 많아야 하는데 한국은 역피라미드꼴이어서 대중 교육, 초등 인문학 교육 인력은 키우지도 않고, 대학 제도나 교과 과정을 보면 첨단 연구자는 가장 많이 양성할 것처럼 돼 있다. 학교 제도 자체가 인문학을 전파하는 인력을 교육하는 코스도 더 많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학의 인문학 연구자들과 인문학의 대중화 인력 사이에 교량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지금 '대중 인문학' 열기에는 몇몇 스타 인문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거기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문제는 언젠가는 짚어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짚어줘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대중이 현명해져서, 여러 번 듣다 보면 옥석도 가려내고, 맞고 틀리는 것도 가려내면서 차츰 수준도 높아질 것으로 본다. 결국 대학 인문학과 대중 인문학 수요 사이의 괴리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다. 이럴 때 대학에서 인문학 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생각해 보면, 너무 도도하게 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서양식으로 첨단 세분화된 분야의 공부만 하고 자기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으면서, 한국에서 인문학이 뭘 할 건가 생각하지 않는 한 나는 그게 비인문적이라고 본다. 스스로 좀더 한국 문화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
자각한다고 해서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역량이 있느냐는 건 또다른 문제다. 학교 강의와 대중 강연은 워낙 다르다. 대학에서는 이번 시간에 못다 하면 다음 시간에 보충해 줄 수도 있고, 학생이 모르겠다고 하면 계속 설명해줄 수도 있지만, 대중 강연은 정해진 시간에 혼자만 이야기하니까 피드백도 어렵고 얼마나 이해하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진행을 해야 한다. 이 방면에도 소질이 있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지금 인문학자가 처한 상황이 그리스 고전 시대 소피스트들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도 학식 못지않게 수사학이 중요했다.
"수사학 얘기를 잘 했다. 수사학이 빠진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인문학의 아주 중요한 일부다. 인문학이 뭐냐는 물음에는 여러 갈래로 답할 수 있는데, 내가 체험하고 알고 있는 걸 남에게 얘기하고, 남이 얘기하는 걸 듣고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본다. 함께 얘기하는 게 인문학이다. 과학과 또다른 게 바로 그 점이다. 과학도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지만 인문학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을 빼면 성립 못한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필히, 말하자면 수사학자가 돼야 한다고 본다. 말을 잘 꾸미는 게 아니라 남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전형적인 인문학자였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보듯이, 남과 이야기하면서 자기 생각을 다듬는다. 그게 다이얼로그이고 인문학이다.
한국의 대학 인문학의 문제를 한 마디로 얘기하라면 대화가 없는, 커뮤니케이션이 사라진 인문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인문학자에게 커뮤니케이션의 1차 상대가 누구인가 하면 한국말을 같이 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언어와 문화와 인문학은 떨어질 수가 없다. 내가 사는 곳에서 한국말을 써서 서로 삶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걸 떠나서 인문학은 성립하지 못한다. 대중 강연은 그 중 한가지 형식에 불과하다. 사실 앞으로 더 필요한 게, 천명 이천명 모아놓고 혼자 떠드는 게 아니라, 저녁 때 모여서 책 한 구절 놓고 같이 토론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 게 여기저기 많이 생기면 그게 한국 인문 문화, 인문학이 제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래도 나는 요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우리 때는 대학 졸업하고 친구들이 취직했을 때는 정말 산업역군들이었다. 하루종일 일하고 남는 시간은 술집 가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식이었다. 집약적으로 일하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그냥 흐트러져 놀아보는 것, 술 먹는 게 레크리에이션의 전부였다. 그래도 지금은 남는 시간을 강연이라도 듣고, 책은 얼마나 읽는지 모르겠지만, 인문 강좌도 들으려고 한다. 이건 엄청난 차이다. 삶의 여유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삶을 의미있게 꾸미려는 것은 인문학에 대한 필요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수요가 이벤트성 강연에 사람이 얼마나 모이느냐는 걸로 가지 말고 동네 도서관에 사람이 얼마나 오고, 조그만 독서 모임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전국에 많이 생기느냐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요즘은 기업하는 사람들, 가령 CEO나 마케터, 젊은 창업가까지 인문학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인문학과 경제적 성공은 어떤 관계일까?
"그게 오늘날 인문학의 또다른 이슈다. 지금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어떤 점에서 문명사적 전환에서 비롯한 필연이다. 인간의 지능에는 여러 기능이 있다. 가령 내가 집중해서 공부하는 문명 초기 단계, 그러니까 BC 약 8세기경 문자를 쓰기 시작한 때에는 사람들 기억력이 굉장히 좋았다. 문자가 없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머리 속에 담고 다녔다. 그때는 머리 좋다는 게 기억 잘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자가 발명되는 순간 기억력이 마구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시대에 와서는 머리 좋다는 게 빨리 배운다는 것이었다. 기억 잘 하는 것보다 빨리 배우고 계산하고 이해하는 게 중요해졌다. 하지만 컴퓨터가 나오고부터는 이해하고 계산하는 능력의 중요도가 격감했다. 과거엔 배워야 했을 것도 이젠 검색하면 되니까.
이제는 패턴의 습득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의 조합을 어떻게 잘 하느냐, 남이 못하는 구성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하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지금부터 지능에서 중요한 것은 남이 못 본 것을 연결시키거나 없던 것을 상상해내는 능력이다. 아주 애매모호한 말이지만 '창의적 사고'가 중요해졌다. 이게 사실은 인문학이 해오던 사고다. 인문학은 과학이 나오면서 아주 느슨한 학문 취급을 잠깐 받았는데, 이제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더 생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예감 단계인데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쓸모'가 아주 중요했는데 쓸모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근데 지금은 안 보이는 데서 뭘 찾아와야 실용이 생긴다. 보이는 데서 찾아오면 이미 실용 경쟁에서 뒤진다. 그래서 지금은 지적 모험을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해졌다. 잡스 신화가 그런 데서 나왔다. 인문학의 인기 이면에는 이런 중요한 변화가 있다. 그래서 말인데, 절대 조급해서는 안된다.
내 경험을 예로 들겠다. 독일에서 귀국할 무렵 투키디데스를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었다. 박사 학위를 1년 늦게 받더라도 이걸 읽는 강좌를 듣고 가야지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투키디데스를 공부하려면 히포크라테스 의학 전집을 같이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투키디데스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서에 쓰인 개념을 사회병리 현상으로 가져와서 진단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역사서 공부하는데 고대 의학서까지 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냥 귀국하고 말았다.
이처럼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다 보면 엉뚱한 길로 이끌릴 수 있다. 내가 미리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길이다. 우리 때는 그런 건 배워서 언제 써먹나 라고 했지만, 지금은 '써먹을' 비전이 없어 보이는 걸 많이 알수록 기회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공학을 하는 사람 같으면 이태백 시를 공부하는 게 오히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남이 못하는 무엇을 해두면 뭐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다. 이 점만 봐도, 대학에서 인문학 하는 사람들이 지금 문명 패러다임 전환이 인문학에 뭘 요구하는가 심각히 생각 안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추천한다면?
"요즘 강연을 몇 차례 했는데 끝나면 무슨 책을 읽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문제는 거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새삼 깨달은 건데 인문학계에서 우리 말로 된 책 공급에 소홀했다. 특히 고전 번역을 안 해놨다. 서양 고전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어 믿을 만한 번역을 내지 못했다. 인문학 책이라는 게 대개 한번 나오고 절판돼도 그만인 책들만 잔뜩 나와있다. 고전을 연구하고 연구한 2차적인 책들이다. 서양에서 많이 팔렸다는 책들은 번역됐지만 정작 평생 볼 만한 묵직한 책은 좋은 번역이 드물다. 전문번역가라는 모씨는 영어판을 주로 번역했는데, 제자들 말로는 오역이 많고, 어려운 구절은 건너뛰었다고 한다. 또다른 어느 분 번역은 원전을 옮겨놓긴 했는데, 고전 번역은 여러 종이 나와서 경쟁해서 대조하면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인력 사정이 그 정도가 안 된다. 결국 해설서를 소개해주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다음 젊은 세대 고전 학습자들의 번역본이 정확도와 가독성이 근래 꽤 좋아졌다. 지금 시급한 일은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책을 내놓는 것이다. 당분간은 가독성 있는 해설서를 앞에 놓고 같이 이야기하고, 결국에는 원전 번역 놓고 토론하는 모임을 만드는 식으로 발전해야 가야 한다. 언젠가 일본 TV 프로를 보니까 어느 시골 현인데 삼국유사 독회를 하더라. 그것도 일반인들이 몇 년째 모여서 하고 있더라. 우리도 그렇게 되면 인문학이 제대로 뿌리 내리는 것일 것이다."
-인문학을 위한 정책 조언을 한다면?
"대학 인문학 연구 지원이나 교육제도 개선 문제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생각이 있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는 유보하고, 인문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지원하는 문제를 얘기하겠다.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인문학 지원을 얘기하는 것은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하지만 너무 K팝이나 한류처럼 조명 받는 것만 지원하면 인문문화가 진흥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런 것은 그냥 둬도 진흥이 되고 시장이 살려줄 거다. 정책적으로 신경써야 할 것은 일본 어느 현에서 삼국유사 읽는 것같은 풀뿌리 모임이다. 공무원은 (서울대 시절 보직교수로) 나도 해봐서 아는데 성과가 멋있게 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데 흔들리지 말고 시골이나 마을의 작은 도서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지금은 김해에 사는데, 여기는 어느 때 시장을 잘 뽑아서 도서관 투자를 여기저기 많이 했더라. 요즘은 평일에도 차를 세울 수가 없을 정도로 성공했다. 신문에 떠들썩하게 안 나는, 구석구석의 인문학 지원 방안을 정책담당자들이 생각해 봐야 한다. 한류 지원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인문학은 스타 강사 강연에 수천명이 모이는 빅 이벤트에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인문학을 읽고 입을 열 수 있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한다. 꾸준히 조금씩.
지방에 살다 보니 웬 축제가 그렇게나 많은데, 대부분은 문화적 뿌리가 없는 것들이다. 중앙에서 가수 불러다 노래 시키고 박수치고 끝나는 식이다. 축제는 동네 사람이 다 참여하는 게 축제 아닌가. 인문학도 유명 강사가 멋진 강연하고 박수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게 진정한 인문학이다. 유명 인사의 말만 듣고 감탄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스타 강사 없이도 내가 내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걸 지원해줘야 한다."
-요즘 감명깊게 읽은 책이 있다면?
"평소에 여러 분야의 책을 굉장히 많이 읽는 편이다. 전공 쪽으로는 역시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철학과 들어온 이후로 계속 재밌게 읽고 있는데 매번 새로운 게 보인다. 아무리 읽어도 놓치고 가는 게 많고, 다른 책을 읽다보면 새롭게 연결이 된다. 내가 논쟁적이고, 논리를 꾸미는 것을 좋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했지만, 플라톤만은 못하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더 깊이가 있고 퍼스펙티브가 더 넓다. 그에 비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설서 수준이다. 하지만 내 적성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맞다.
비전공 분야 서적의 경우엔, 30대부터 지금껏 계속 읽고 또 읽는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다. 너무 재미있다. 문자가 씌어지기 전 세계를 처음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전사(pre-historic) 시기에 대한 내 호기심을 계속 자극한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문명 속에 산다는 게 뭔지, 지금 문명이 자명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많이 느낀다. 전혀 심각하지 않은 독서도 꽤 많이 한다. 소위 3류 탐정소설, 스릴러도 즐긴다. '왕좌의 게임' 같은 환타지 소설도 재미있게 본다. 이런 책의 한 구절을 가지고, 강의할 때 한 30분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학생들도 재미있어 한다"
<;추가 이메일 문답>;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관해 묻고 싶다. 최근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이 부상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도 전통 인문학의 사변이나 직관보다는 자연과학적 연구 성과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물론 과거 인문학에서 이야기한 인간 이해에 대한 통찰이 경험적 연구나 실험 결과로 입증이 되거나 확인되는 경우도 많지만,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미국에서는 인문학도 넓게 하나의 (자연)과학 안에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탐구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사실(fact) 인식을 목표로 한다. 그런 목표를 추구하는 탐구의 방법으로서 인문학은 과학과 경쟁 관계에 있지는 않다. 관찰과 실험, 가설 세우기, 설명 이론의 모델 구성, 수학적 추론 같이 오늘날 과학적 방법의 핵심을 이루는 주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적용할 경우,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정교하고도 신뢰할 만한 인식 성과를 낼 수 있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그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낼 다른 대안적 학문방법론의 존재 가능성은 사실상 생각하기도 어렵다. 인문학에 통상적인 의미에서 방법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과학과 겨룰 만큼 대안적 위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이 할 일을 과학이 더 잘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할 수 있을 일을 인문학이 더 잘 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인문학이 하는 일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과 과학은 다같이 학문이라는 큰 지붕 아래 수행되는 지적인 활동이지만 서로 겨룰 일이 없다. 한마디로 다른 종목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사실 인식을 목표로 해서 성립된 학문이 아니다. 사실 인식은 과학의 고유한 임무다. 과학과는 달리 인문학은 인식된 사실의 의미 연관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인식된 내용을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 거기에 부여된 기왕의 의미를 캐내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좋음, 나쁨, 옳음, 그름의 가치평가가 이루는 격자망 안에 엮어 넣는 것이 인문학이 하는 일이다.
인간은 사실 인식만을 바탕으로 해서 곧바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 않는다. 가령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가 과학자인 한, 우리는 그에게 그 사실이 인간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고민하라는 주문을 하지는 않는다. 지구 위에서 인간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탐구 범위에 들어 있지 않다. 그 사실로 인해 천체 운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신을 닮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중심적인 존재이고, 물리적 세계 전체도 그 사실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다는 믿음 속에서 삶을 영위해온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까지 그들이 갖고 있던 인간 삶에 대한 생각이 통째 흔들리게 된다. 물론 새로운 사실을 거부하고 그때까지 지녀왔던 생각을 그냥 고수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면 인간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때까지 머릿속에 유지돼온 좋음, 나쁨, 옳음, 그름의 평가 척도가 이루는 격자망의 구성이 한층 더 복잡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복잡해진 만큼 더 넓은 이해의 지평이 확보된다. 그렇게 좀더 넓은 지평을 확보되는 과정이 곧 심각한 인문학적 고민에 동반되는 성찰의 과정이다. 그런 인문학적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과학자로서 갈릴레오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글쎄, 어쨌든 지구가 태양을 돌지요"라는 것뿐이다.
과학은 사실 인식을 넘어, 그 사실을 받아들인 뒤 인간이 삶의 스토리를 어떻게 꾸며야겠는가 하는 질문까지 맡아서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이 한때 교황청이 했던 것처럼 연구에 개입해서 천체 운동에 대한 사실 인식을 왜곡시키려 들 권한은 없다. 인문학은 과학의 사실 인식 성과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면 인문학은 비이성적인 푸닥거리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임무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양 근세 이래 과학이 계속해서 기술과 밀착돼 가면서 그림이 좀 바뀐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현대 기술이 과학의 인식 성과를 인간 삶에 연결시키는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게 됨에 따라, 인간 삶에 주는 영향이 엄청나게 커진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특히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 성과까지 활용하는 첨단 기술이 개발되면서 인문학과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다.
여기서 우선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인문학이 인간 자신에 관한 사실 인식에 있어서도 과학의 성과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전통적인 방법인 내성(內省,introspection)이나 직관에 의한 자기 파악이 늘 믿을 만한 인식 성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과학적 방법이라면 덮어놓고 신뢰하는 것도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과학적 방법은 어쨌든 인간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좀더 객관적인 검증 절차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해준다. 뇌의 구조나 DNA 정보를 탐색한 것이 인간의 사고 작용이나 성격 형성 등에 관해 좀 더 정밀하고 확실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그 인식의 성과를 기술로 활용하는 단계에 있다. 원칙적으로 인간에 관해서도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사실 인식을 목표로 하는 연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 관한 지식은 탐구 단계부터 인간에게 좋고 나쁜 것에 관한 가치판단이 개입해, 연구 대상 범위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인간의 몸에서 탐구할 것이야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머리카락에 백발이 몇 프로 섞여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폐 속에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같은 값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암세포 탐지법을 찾아내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서둘러 개발하지만, 머리카락 수를 세고 분류하는 기계를 발명하려 드는 사람은 없다. 뇌와 DNA가 연구 대상이 된 것도 선행하는 가치판단이 있었던 때문인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인체가 아닌 자연에 관한 연구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와 같은 가치 판단은 인식 성과의 기술적 활용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한다. 암세포에 관한 사실 인식의 내용은 곧 암 치료의 기술로 이어져야 한다. 뇌와 DNA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것들에 관한 사실 인식의 내용은 뇌의 기능을 증강시킨다거나 유전 정보의 조작을 통해 좀 더 개량된 후손을 생산해내는 기술로 이어지기를 당연히 기대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과학 기술이 인문학의 역할을 통째 떠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 Sloterdijk)는 전통적인 인문학은 훌륭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학 기술의 힘으로 좀 더 훌륭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일에 기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와 직접 만났을 때는 그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소위 트랜스휴머니즘의 신봉자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휴머니즘처럼 인간 개량을 오직 인문학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과학 기술의 힘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사실상 인문학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뇌에 뉴런 수를 획기적으로 늘려주면서 고상한 인간성을 갖추도록 관련 뇌 부위에 조작을 가해 부처님 같은 성인을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떨까? 우선 불경 공부를 하느라 고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예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류 전체가 다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태어나 부처님 같이 자비로운 생각만 하면서 살게끔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이 곧 인류의 구원이자 천국의 도래일까? 그런 인간만 태어나면 소위 인문학적 고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SF같은 이야기가 트랜스휴머니스트나 과학 기술의 신봉자들이 꿈꾸는 것이라면 인문학은 이제 역할을 접어두고 인간 개량 기술 개발에 열중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 개량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정말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게 바로 인문학이 할 일이다. 인문학은 진정 좋은 것이 무엇인지 미리부터 답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내용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인문학이다. 좋은 것, 우리가 실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의 일이다. 그것은 뇌과학이나 유전공학이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분야의 지식을 기술로 연결시키고 기술을 활용할 방향을 결정하려면 인문학적 성찰을 건너 뛸 수 없다. 인문학적 성찰 없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장님에게 좋은 지팡이를 장만해주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태어날 아기가 높은 IQ와 큰 키에다 유전적 질병 요인은 일체 없이 태어나도록 하려는 꿈은 차라리 소박한 것이다. 그 정도 일은 뇌과학자나 유전공학자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전체가 어느 방향으로 스스로를 진화시켜 가야 좋은지는 뇌과학자나 유전공학자가 모든 인간을 대신해 결정할 수 없다. 다 같이 부처님이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도 부처님의 깨달음과 그의 사색 내용이 실제로 무엇인지, 그의 품성이 정말 어떤 것인지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한 어떻게 뇌나 유전자를 조작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성인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인문 소양을 갖추지 않은 기술자들에게 뇌 조작을 어떻게 맡길 수 있겠는가?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처님의 뇌 상태를 완전히 알아내 그렇게 되게끔 성공적인 수술을 해줄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얼른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술적 조작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깨달음에 도달한 삶 자체를 보람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 같다. 그냥 실험실에 있는 쥐의 삶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정말 악당 같은 독재자가 온 국민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 독재자가 참으로 신기한 약을 발명하게 했다. 이 약을 복용하면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다 없어지고 그저 행복한 기분만 든다. 독재자가 국민 모두에게 그 약을 먹게 해, 모든 사람의 뇌에서 민주국가 국민들 뇌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화학 반응만 일어난다고 치자. 그 제약 기술이 모든 정치 문제의 해법일까? 만일 과학 기술이 인문학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다는 것이 그 비슷한 방식의 해결이라면,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인문학이 과학과는 구별되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좋은 것을 쉽게 찾아내 확정하지 못하고 모색을 계속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진정 좋은 것이란 기술적 조작을 통해 좋은 것을 일거에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애쓸 수 있는 것이 좋은 것 아닐까. 그렇게 애를 쓸 수 있는 삶이 보람찬 삶이지 않을까. 우리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수년간 고행을 통해 달성한 것을 거룩하게 여긴다. 부처님이 좋은 과학기술자를 만나 약 하나를 얻어 먹었든지, 뇌 수술을 받았든지 해서 성불했으면 우리는 거기에 아무런 값도 쳐주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문학의 종언을 불러올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있겠지만, 과학 기술은 뇌과학이든, 유전공학이든 인간의 삶을 어떻게 꾸며야 정말 좋은지, 정말 의미와 보람이 충만한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답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진상이다. 사정이 그런 한 과학 기술이 인문학의 역할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미래와 운명에 관한 질문이다. 인공지능 연구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만의 특장과 신비로 여겨졌던 영역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다른 한편, 인간도 다른 생물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 힘을 더하고 있다. 휴머니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인간의 존엄에 기여했던 인문학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명제가 오늘날 새삼스럽게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명제는 이미 20세기 초입부터 과학에 소양이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상식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잘 알다시피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 서양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생물 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앞선 지식인들이 그런 통념에 반대되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다 보니, 인간과 다른 생명체는 서로 다를 게 없다는 간명한 표현을 서슴지 않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대 전환적인 분위기라는 맥락을 떠나서 보면, 그 말 자체는 이동(異同)의 판가름 기준을 명백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위 판정도 할 수 없는 불명확한 명제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연히 인간과 다른 생명체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고 해야 한다.
진화론자들도 단적으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단절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 선 상의 정도 차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겠다. 여하튼 연속 선상의 차이라도 차이는 차이다. 문제는 그 차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일텐데, 그것은 생물학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 점은 진화론자 대부분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진화론이 학문적으로 신뢰할 만한 이론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인간은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진화론이 등장한 후에도 그전처럼 인간은 소나 돼지를 도살해 고기를 먹으면서 그것을 악행으로 처벌하지 않는 반면, 인간을 죽이고 인육을 먹으면 천인공노할 흉악한 짓으로 여겨 극형에 처한다. 또 침팬지의 유전자 정보는 인간과 99%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침팬지에게 인간이 누리는 존엄성의 99%를 부여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과학적으로는 연속적인 정도 차라고 하면서 인간 삶의 실제에서는 단절이 있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일관성 없는 비이성적인 일일까? 아니다. 바로 1% 차이에 인간에게만 존엄성을 인정할 근거가 담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전체적인 차이는 연속적인 것이라 해도 인간 존재만을 특별히 존엄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 차이는 물론 과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유전자 정보라는 점에서, 영혼의 존재가 존엄성의 근거라고 고집하는 것과는 다르다. 엄연히 과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 즉 DNA의 어디엔가 그 자리가 특정될 수 있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라고 지목한 부분이 존엄성의 근거라는 표지판을 달고 있을 리는 없다. 그것조차 인간이 해석을 통해 부여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의 이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존엄성 운운하는 것이 과학적 근거는 없는 허구라고 물리칠 수는 없다. 존엄성은 직접적인 과학적 발견의 대상은 아니라고 해도, 단적으로 없는 것은 아니다. 존엄성이 존재하는 방식은 과학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 존재하는 방식과 다른 것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자연적 특성을 집어 내, 그 특성의 발휘를 앞으로 계속 귀한 것으로 여겨 권장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행위에 존재 근거가 있는 것이다.
마치, 민주주의가 전혀 허구가 아닌 까닭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정의라는 이념 역시 마찬가지다.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쓴 사람들이 이룬 사회와, 부정의가 횡행하는 사회의 차이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면, 정의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그저 허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핵심을 이루는 이념이었다. 휴머니즘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혐의를 가질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는 기실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면서 그것을 교묘히 은폐하는 명분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개념이다. 사실, 어떤 이념이든지 그런 방식으로 오용될 가능성은 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그냥 사실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 인간의 삶과 관련된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려 들면 갖가지 이념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미래를 향해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학은 오직 사실(fact), 즉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만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fact'는 어원적으로 '행하다' 또는 '만들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facere'의 과거분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fact'는 어원적인 수준에서는 이미 만들어진 것, 행해진 것, 그래서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의 뜻을 갖고 있다. 아직 'fact'가 되지 않은, 즉 사실이 되지 않은 미래를 꾸며야 하는 인간은 오직 기왕에 있었던 사실만 되풀이하려 들지는 않는다. 되풀이만 하는 삶은 아무런 스토리가 없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상태일 것이다. 미래를 향해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낼 때 필히 참조해야 할 조건으로서 기왕에 있었던 사실에 관한 설명은 제공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답까지 주지는 않는다.
과학적 방법을 통해 알아낸 내용을 가지고 인문적 성찰을 한답시고 이데올로기에 빠질 위험이 있는 해석을 가하느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주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주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과학을 물신(物神)화해 숭배하는 과학주의 이데올로기다. '과학주의'는 '과학'과는 다른 비과학적 맹신이다. 그 신앙이 지향하는 것이란 결국 인간의 행동 의지를 무력화해 - 좀 심하게 말하면 - (산 사람이 아닌) 송장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결국 인간 존엄성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조그만 차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위에서 인간의 유전 정보가 침팬지와는 1%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조그만 차이가 바로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의미 있는 스토리를 꾸며 가며 살아가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도 바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 답의 내용에는 분명 자기 회귀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인 모순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 답은 사실 인식 또는 사실 확인의 명제가 아니라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 이태수 교수 약력
1967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69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1981년 독일 괴팅겐대 박사
1982~2008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
1995~1997년 한국 유네스코 위원, 감사
1996~1998년 한국 서양고전학회 회장
2004~2006년 한국철학회 회장
2008년~현재 인제대 교수
2009년~현재 인제대 인간환경미래연구원장
◆ 이태수 교수 인문학 강연 동영상
- 정의란 무엇인가
-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http://m.media.daum.net/m/media/economic/newsview/2014102508011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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