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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2013

도시는 진화하는 유기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282017125&code=960202


[건축과 삶](Ⅰ- 5) 강남 이야기
유현준 | 홍익대 건축대학 교수



서울 강남역에서 교보타워 4거리에 이르는 뒷골목은 20대의 욕망이 분출하는 거리다. 성형외과, 보디숍, 한의원, 유학원, 외국어학원, 제화점, 미장원, 맥줏집, 갈비집, 횟집, 삼겹살집, 햄버거집, 제과점, 커피전문점, 은행, 모텔, 오피스텔…. 흥청대며 몰려다니는 이들의 수요에 맞춰 다양한 직종의 가게들이 한 골목에서 밤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이런 도시구조는 초기에 이곳을 계획한 디자이너가 구상하고 그렸던 건 아닐 것이다. 그리드 형태의 도로망은 도시 계획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뒤의 교육제도, 인구 폭증, 주택가격, 핵가족화 경향, 경제성장, 문화적인 변화, 부동산 정책 등 셀 수 없는 요소에 의해 지금의 도시구조가 만들어졌다. 혹자는 도시를 신의 창조물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빌딩, 다리, 상하수도 시설, 도로 같은 도시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리적인 구조들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도시는 실제로 도시 설계자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방식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 왔다는 면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자생적인 유기체라고 할 수도 있다. 

■ 도시는 유기체

도시가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면을 이해하기 위해 생명과 상반된 개념인 기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모든 부품들이 먼저 디자인되고, 이후 공장에서 제작되고 조립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동차는 고정된 부품들로 만들어진 구조체이다. 자동차는 일단 완성되고 나면 새로운 물질이 유입되어 자동차 스스로 새로운 부품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최초 제작된 상태로 유지되면서 노후한 부품들만 교체될 뿐이다. 이렇듯 기계는 스스로 성장, 발전하지 않고 디자인된 초기 상태에서 노후화하는 닫힌 시스템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 시스템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한다. 생명체의 안팎으로 끊임없이 물질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열린 시스템이다. 

2002년 노벨상 수상자인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로버트 호로비츠 교수에 의하면 많은 세포들은 스스로 소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세포가 스스로 자살하듯이 소멸되고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는 것이 생명체의 고유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 시스템은 기존 세포를 끊임없이 소멸시켜 가며 외부로부터 새로운 물질을 받아들여 새로운 세포를 만들면서 성장한다. 생명체에 이 같은 성장, 발전, 진화가 있듯이 도시에도 성장, 발전, 진화가 있다. 

물리학자이자 생태학자인 프리초프 카프라 박사에 따르면 어떤 시스템이 살아있는 유기체냐 죽어있는 무기체냐를 결정하는 요소는 그 조직체의 패턴이 스스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냐 아니면 외부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도시는 초기 계획자의 디자인이라는 수동적인 패턴을 뛰어넘어 특정한 디자이너의 계획 없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패턴들을 보인다. 자생적 패턴은 도시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기에 충분한 증거다. 

그렇다면 왜 물질로 구성된 도시가 살아있는 유기체적인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일까? 물론 대부분 도시 구성의 변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변화들은 인간에 의해 디자인된 것이라기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 만들어낸 변화들이 모여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 불특정 다수인 인간이 유기체 생명이기 때문에 도시가 유기체의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유기체 생명인 인간은 모여서 사회라는 조직을 형성하고 이 조직은 우리가 파악하거나 컨트롤할 수 없는 또 다른 유기체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유기적인 인간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 도시다. 따라서 완전한 도시 디자인이란 불가능하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를 그려도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도시라는 것이 인간의 디자인으로 시작되지만, 계획자의 손을 떠나 완성된 예는 서울 강남 개발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강남의 경우 초기에 그리드 형태의 도로망은 도시 계획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뒤 학군제 형식의 교육제도, 베이비붐 세대의 인구 폭증, 주택가격, 핵가족화 경향, 경제성장, 문화적인 변화, 부동산 정책 등 셀 수 없이 많은 변동 요소에 의해 지금의 도시구조가 완성됐다. 자연 발생적인 생태계의 특징과 더 유사한 면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도시 속의 먹자골목들, 건물 지하실마다 들어선 룸살롱들, 50% 이상을 차지하는 아파트 주거형태, 빈틈마다 주차된 자동차로 꽉 찬 도로 등은 초기에 서울 강남을 계획한 디자이너가 구상하고 그렸던 구조가 아닐 것이다. 지금 도시의 구성들은 마치 자연 발생한 유기체의 모습과도 같다.

진화생물학자인 로저 르윈 박사는 “생명의 진화 속에서, 과거의 경험들은 DNA 안에 유전적인 메시지 코드로 압축 저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보면, 오랜 역사를 통해 구축된 과거 경험의 흔적이 우리가 사는 도시의 주거, 도로, 광장, 학교, 대중교통체계, 상하수도 인프라 같은 도시의 DNA 속에 유전적 메시지 코드로 압축 저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도시의 패턴은 인류 사회의 초기부터 진화되어 왔다. 현대 도시의 패턴은 지난 수천년간 인류가 이루어낸 사회적,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구성요소들은 우리 도시의 DNA이며 과거 역사가 압축된 형태의 유전자 코드인 것이다. 더 재미난 사실은 역사를 통해 보이는 도시 진화의 특성이 생명의 진화와 그 과정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 로마, 파리, 뉴욕의 진화 단계는

진화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진화론자들은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진화가 시작되어 지금의 인간과도 같은 복잡한 척추동물까지 진화했다고 보고 있다. 먼저 초기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는 하나의 세포 안에 가장 기본적인 생명 유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단세포로 있을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다세포의 생명체로 진화하기에는 단세포 구조만으로 여러 개의 다른 세포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 원활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 조직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는 혈관 네트워크와 순환계를 만들었다. 순환계 덕분에 더 많은 세포에 혈액을 통해 산소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더 큰 조직의 생명체가 만들어졌다. 

이후 생명체가 신경세포인 뉴런을 만들어 뉴런들의 네트워크인 복잡한 신경계를 갖춘 생명이 탄생했다. 신경계가 만들어진 덕분에 먼 곳에 있는 세포들로부터 감각을 전달받고 반응할 수 있는 생명체로 진화한 것이다. 이 다세포 생명체는 다시 오랜 시간을 거쳐 척추라는 새로운 개념의 체계적인 신경 조직망을 구축하게 된다. 그 결과 지금의 여러 척추동물과 같은 종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체는 순환계, 단순신경계, 척추신경계로 진화해 왔다.

도시의 진화 단계도 생명체의 진화 단계와 비슷하다. 고대의 도시들은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다. 기껏해야 몇 개의 길과 건물이 전부였을 것이다. 마치 단세포 아메바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유지 시스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시적 도시에 인구가 모이고 규모가 커지면서, 많아진 거주자를 위해 더 많은 물이 필요해졌다. 생명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선 피가 필요하듯이 도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물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피에 비유될 수 있는 물을 도시의 구석구석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 물의 순환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필요에 잘 부응한 도시는 그 규모를 키워서 도시 간 생태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대 로마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토목기술을 이용해 수로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엄청난 양의 물을 로마 시내로 공급했다. 이를 통해 더 크고 효율적인 도시가 만들어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더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인 강력한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로마제국을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은 물 공급이 잘 되는 로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의 유적을 통해 짐작하건대 로마 시민 한 사람이 사용한 물의 양은 당시 다른 도시의 수십배에 달했다. 우리가 잘 아는 카라칼라 목욕탕의 규모만 보더라도 물 소비량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로마보다 1000년이나 지난 뒤에 살았던 루이 14세도 1년에 한 번 목욕을 했다는데, 로마 시민들은 목욕탕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고대 로마의 물이 얼마나 풍족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도시에서 상수도 시설은 유기체의 혈관 중에서도 동맥의 형성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고대 로마는 순환계 부문이 가장 먼저 진화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순환계 다음의 진화 단계인 신경계는 생명체 내에서 각기 다른 기관과 세포 간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도시 시스템에 비유한다면 사람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교통망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교통망이 가장 혁신적으로 발달했던 도시는 어디일까? 아마도 도시 교통망을 가장 혁신적으로 개선해 진화의 다음 단계로 도약한 도시는 19세기 중반 오스만 시장에 의해 도로망이 리모델링되었던 파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거미줄처럼 복잡한 유럽의 여타 중세 도시 교통망과는 달리 사통팔달로 뚫린 파리의 방사형 교통망은 파리를 세계에서 도시 내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앞선 도시로 만들어주었다. 파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하수도 설비도 완성했다. 생명체에 비유한다면 혈관의 정맥 네트워크까지 완성된 도시 진화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파리가 19세기를 대표하는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이 같은 진화의 단계에서 가장 앞서나갔기 때문이다. 이후 지하철 네트워크 개발까지 이어져 파리는 오랫동안 전 세계에서 순환계와 신경계가 가장 진화된 도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생명체에서 진화의 다음 단계는 척추신경계의 발생이다. 도시 진화적인 측면에서 척추신경계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전화망이다. 전신전화 설비는 알다시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먼저 보급되었으며 전화통신 시스템이 잘 설치된 뉴욕은 20세기 들어 세계를 이끌어가는 도시가 되었다. 이 시스템으로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인 월스트리트를 가질 수 있었고 세계의 수도라는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전화통신망이 척추신경계 진화의 첫 단계라면 다음 단계인 인터넷 통신망의 구축은 향후 세계를 선도하는 도시가 될 수 있는 키가 될 것이다.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이 강화된 케이블이나 인터넷은 감각신경계가 발달한 진화의 단계로 비유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서울은 이런 면에서 아주 진화된 도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도시 진화 단계인 무선통신망의 구축은 물리적인 구성을 넘어 영혼, 텔레파시와 같은 영장류의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은 무선 인터넷 신경망이 잘 구축된 도시다. 하지만 서울의 고질적인 교통 체증은 서울이 세계적인 도시로 부상하는 데 발목을 잡는 동맥경화와 같은 병이 될 것이다. 

■ 바이러스 같은 도시

자, 그렇다면 고등 척추동물과도 같은 수준으로 진화한 현대의 도시는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순환계와 신경계 측면의 진화에서 바라본 현대 도시의 진화 단계는 유기체 진화의 최종 단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에너지 소비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아직도 고대 도시 수준에서 하나도 진화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다시피 도시라는 유기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다. 실제로 도시가 바람직한 다음 단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유기적인 성격을 더 가져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물성이 아닌 식물성의 유기체적인 특징을 더 가져야 한다. 현대의 도시는 에너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생명체에 기생해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생존한다. 이런 면에서 영화 <매트릭스>에서 에이전트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도시는 진화한 유기생명체라기보다는 생명 진화의 초기 단계인 바이러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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